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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수선교사

빅터 웰링턴 피터스(Victor Wellington Peters, 1902. 9. 29 ~ 2012. 8. 12)남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피도수(皮道秀)

빅터 웰링턴 피터스(Victor Wellington Peters, 1902. 9. 29 ~ 2012. 8. 12)남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피도수(皮道秀)
1902년 9월 29일 미국 캔자스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9년 가족과 함께 남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도착하자마자 피도수는 새로 설립된 UC 남부캠퍼스에 등록했다.(UC남부캠퍼스는 나중에 UCLA가 된다).
이 새로운 캠퍼스는 2년 과정의 학부과정만 제공되었으며, 4년제 학위와 다른 학위는 버클리 캠퍼스에서만 수여되었다. 1921년 UCLA에서 학업을 마친 후, 피도수는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와 함께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알함브라(Alhambra)와 로즈미드(Rosemead)에서 1년동안 집을 짓는 일을 했다. 집을 짓는 일을 배우고 피도수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924년 USC의 교양 대학(現USC Dornsife)에서 미술계열에서 B.A학위를 수여하고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대학원 학위를 취득했다. 1928년 2월 12일 프린스턴신학교 주일예배에서 귀에 들리는 듯 ‘한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소리를 듣고 주한 선교부에 연락하였고 이에 선교 요청을 받아 내한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를 계시로 여긴 피도수는 부모에게 편지하여 이 사실을 알렸는데, 아버지 피터스(F.N. Peters) 역시 이미 계시를 받아 알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1928년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을 마친 후 그 해 8월 29일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파송받아 13년동안 내한하였다. 서울에 머물면서 한인수 목사에게 한국어를 배웠는데 한달 후에는 길에 나가 모르는 사람과 인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용산교회에서 한국말로 설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음해 4월엔 천안교회 부흥회를 인도했고 안식
년을 제외한 12년간 한국 선교를 위해 봉사했다.
1929년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견습을 받았고 경기도 양주, 포천지방에 파송받아 전도를 시작했으며 스톡스(M.B. Stokes)가 주관하는 서울 중앙전도관 직원으로 전국을 순회하는 부흥운동가로 활약하였다. 그의 전도여행은 대구, 대전, 개성, 해주, 청진, 진남포, 평양, 만주, 북경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으며 1930년 9월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1년에는 서울 중앙전도관 부관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32년 서울 돈암리교회에 파송받아 시무하였다. 1933년 귀국하여 1년간 휴양하였고 1934년부터 다시 서울 중앙전도관 부관장으로 시무하면서 포천, 양주지역 전도에 주력하였다. 그 해 개성 중앙전도관 총무로 부임하는 한편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1937년 강원도 김화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부임한 지 약 3년 만에 김화읍교회를 교인 수 250명으로 성장시켰고 한국식 석조 기와집으로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1938년 2월 27일에는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의 한국인 한흥복(루스, Ruth)과 결혼하였는데 당시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국제결혼이라 교회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화젯거리가 되었다.
동료 선교사들까지도 반대한 이 결혼식은 한사연 목사의 주례로 김화읍교회에서 베풀어졌는데 한국 선교를 위해 철저히 한국인이 되기 위해 애쓰던 그로서는 국적을 초월한 결혼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1939년에 첫 아이인 글로리아 그레이스 피터스(Gloria Grace Peters)를 낳았다.
그러나 일제 말기 선교사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1941년 1월 부득이 한국에서 쫓겨갈 수밖에 없었고 해방 후 즉시 귀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캘리포니아의 재미한인감리교회 협동목사로 봉직하다가 교단을 나사렛교회로 바꾸어 파사데나에 머물면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나사렛교회 원로목사로 봉직하였다.
1959년에는 아주사 대학(現 아주사 퍼시픽 대학)에서 대학교수로 8년동안 여러 분야에서 30개 이상의 과목을 가르쳤고, 그 때 당시의 학생들은 그를 ‘르네상스 맨’(The Renaissance Man.)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뛰어난 예술가였다.  한국에서 기독교적인 색채를 한국 문화에 녹여낸 수많은 그림을 남겼지만 한국 전쟁 중에 많은 작품들을 잃었다. 150개 이상의 작품을 남겼으며 1968년에서 1973년까지 로스앤젤레스의 인쇄회사에서 삽화 및 로고를 그리기도 했다.
또한, 1999년부터 2004년까지는 패서디나(Pasadena,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도시)의 퓰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한국인 박사 과정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0년 11월, 피도수는 가족과 함께 USC로 돌아와 한국 유산 도서관에서 지도와 참고 서적을 통해 한국에서의 시간을 회상했다고 한다. 피도수는 4명의 자녀, 8명의 손자, 27명의 증손자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피도수는 한국에서 활동할 당시 한복과 고무신을 즐겨 신었고 서양 주택을 마다하고 한국식 주택에 살면서 한국 음식을 즐겨 먹었고 한국말로 유창한 설교를 구사할 수 있었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예수성찬”, “파도를 잔잔케 명령하는 예수”, “십자가 밑에 우는 마리아”,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등의 성화를 그렸으며 한복의상을 입은 예수는 물론 십자가 밑에서 슬퍼하는 여인들을 한복 입은 한국 여성으로 표현하는 등 성화 속에 한국인의 모습을 그대로 등장시켰다. 그가 건축한 김화읍교회는 태화기독교사
회관 건축양식을 딴 전통적 한국 건축물이었으며 한국인들이 등장하는 성화들로 장식된 교회였다.
피도수는 또한 철저한 신앙운동가였다. 자신의 생일보다 오히려 중생을 체험한 날(1922. 1. 7)을 중히여긴 그는 수많은 부흥집회를 통해 무엇보다 교인의 중생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의 설교의 주제는 자연구원의 확신에 있었다. 김익두에 관한 글을 연재하기도 하였고, 특히 이용도 목사와도 개인적인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그를 지원하였다. 이용도가 별세한 후 3년이 지난 1936년 The Korea Mission Field에 “시므온, 한국의 신비 운동가” (Simeon, a Korean Mystic)라는 제목으로 12회에 걸쳐 그의 생애를 정리
하여 발표하였다. 그 글은 「이용도 목사의 영성과 예수 운동」이라는 책에 번역되어 있다. 그 외에도 1935년 스톡스, 정남수 등이 주축이 되어 창간한 신앙지 <성화>(聖火)의 편집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신앙 및 성서에 관한 많은 글들을 집필하였다.

십자가 아래 마리아의 모습을 완벽한 조선 여인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운보 화백의 그림보다 20여 년 전의 그림이다.

김화 교회 행사에서 사용한 그림.

1936년 The Korean Mission Field에 12회에 걸쳐서 연재된 “Simeon, A Christian Korean Mystic” 글을 통해서 이용도의 삶과 신앙에 대해.

1928년 피도수가 한국으로 파송되면서부터 시작된 이용도와 피도수와의 만남은 매우 자연스럽기조차 하였다. 양주 포천지방을 관할하던 도마련(M. B. Stocks)의 지도하에 움직였던 초임선교사 피도수는 1930년 여름 이용도와 함께 나란히 목사안수를 받았고 통천지방 파송을 받지 못한 무임목사 이용도의 생활비를 대주면서 사직동 집에서 함께 살았던 인연으로 말미암아 피도수-이용도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없는 깊은 유대 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용도의 생애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으며 그의삶에 대해 연재한 것, 즉 이용도 목사의 회상기가 “Simeon, A Christian Korean Mytic”이다.
피도수가 본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반지성적인 성향이 두드러졌다. 이미 기도하는 여자들이 주장하는 계시를 믿기 시작하였다.
2)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몬타너스파들이나 카미사드파, 어빙파, 오순절파 등 미신적인 여러 가지 사소한 것을 숭상하였다. 예를 들어 인디아의 선다 싱이 승천했다든지 몽골에서는 재성육신이 이루어졌다든지 예수의 진짜 탄생일은 1월 3일이며 부활은 4월 14일이라든지 어떤 여자가 뜨거운 화로를 손 하나 다치지 않고 옮겨놓았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3) 분파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다 결연한 순교자로 자체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의사소통이나 연대의식이 생겨날 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국은 조그마한 차이도 크게 느끼고 심각한 이견이 있다고 생각하여 곧바로 불화관계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갈라서게된다.
4) 눈에 띄는 특색이 있다. 즉, 기도할 때 온 몸을 크게 떨고 흔들면서 기도한다.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경련이 일어나고 흥분으로 떨고 손과 발을 뒤흔들고 때로는 온 몸을 뒤집기도 한다. 또 성령이 나타난다든지 영매가 등장할 때에는 쉿소리나 영매와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 깊은 무의식으로 들어간
다. 또한 어떤 영이 영매를 부르듯 상대의 목소리를 장악하거나 대신해서 흉내내듯 발성을 하고 의사를 소통하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무당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도 목사는 다음과 같은 우수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 사랑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문제 해결의 방법은 사랑에 있다고 믿었으며,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살고자 하였다. “창녀를 무시하고 고아와 거지들을 돌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수있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처럼 베풀고 나누는 영성으로 살기를 바랐다. 그는 바
위를 하나님의 제단처럼 여겼고 차갑든지 뜨겁든지 구애받지 않고 불평하지 않았으며, 낮기도할 때는 새가 함께 있었고, 밤기도할 때는 벌레들이 동행하였다.
2)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도는 그에게 있어 대화의 시간이었고, 삶의 전체였다.
3) 그는 겸비의 사람이었다. 선과 악도 모두 나의 스승이라는 善惡皆吾師(선악개오사)의 삶을 살았다.
4)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살았다.
5) 비세속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돈을 쓰는 것도 한꺼번에 몽땅 다 쓰고 말았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무섭지 않다는 완전 타계적인 신앙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 관념도 없었고, 생활의 계획도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떠한 제약이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