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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연 목사(1879-1950)

세 아들을 바친 순교자 “양 때를 남겨두고 목자가 떠날 수 없다”

한사연목사

[한사연 목사에 대하여]

한사연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기를 시대마다 실천했기에 수많은 고초를 격으면서도 껵이지않는 신앙의 삶을 살다가 떠나셨다. 그는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아버지 한보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방의학을 배웠으며 총을 잘 다루는 포수였다. 1907년 강원도 이천에서 세례를 받고 1909년부터 공산당에게 희생되어 순교할때까지 김화를 줌심으로 강원도 서북부 산간지역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의 아내는 미신을 섬기는데 열심히였으나 세례를 받은후 김마리아라 개명했다 한다. 김화지역은 양심전으로 유명한 윤승근과 하디선교사의 복음전파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1901년 하디 선교사에의해 15명이 세례를 받고 지경터에 교회가 세워졌고 지역에도 새술막교회가 세워졌다. 1914년 경원선의 완성은 교통의 중심축이 철원으로 바뀌였고 이후 금강산전철로 선교의 중심축도 지경터에서 철원과 김화가 중요하게 되었다. 한사연목사는 그런 격변기에 김화를 중심으로 목회를 했다. 1911년 회양구역 구역장으로, 14년부터는 금성구역장으로 사역하며 전도사가되고 이후 삭녕구역장으로 평강구역장으로 사역하며 1926년 장로목사안수를 받았다. 29년부터 다시 금성구역장이되고 이후 김화와 금성교회에서 목회를 한다. 강원북부의 외딴지역을 복음의 발걸음으로 밝히는 사역이였다. 이 과정에서 1919년에는 반일 활동과 관련하여 9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할만큼 복음과 민족은 비껴갈수 없었다. 삼일만세운동때 한목사의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지만 삼일운동이후 상해 임시정부와 유대하여 독립대한청년단을 만들어 기독교민족주의 활동을 이끌었다. 이것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이가 10명인데 그중 8명이 금성교회와 주변 교회 성도들이였다. 그중 하나인 한사연의 수양아들 한성옥은 후에 목회자가 되었고 장흥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감당한다. 일제말기 선교사들이 추방당할 때에는 김화지역의 많은 신앙공동체를 책임져 목회를 했다. 해방이후 그의 목회는 여전히 가시밭길로 기독교 신앙은 공산주의와 충돌했다. 김화지역은 한사연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민족진영과 장보라로 대표되는 공산진영이 존재했다. 장보라도 한사연도 일제시대 독립을 목표로 활동할때는 협력자였다. 하지만 한목사는 교인들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도록 인도하고자 조선민주당에 가담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정치적으로 서로 극복의 대상이였고 기독교는 상대적 약자였지만 한사연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민주당원으로 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49년에는 화가 박수근과 그의 아내 김복순이 조선민주당의 공천으로 군의원과 면의원으로 당선될만큼 활동적이고 지지도 많이 받았음을 알수 있다. 한사연목사는 공산당의 압박에도 가족들까지도 교회와 지역을 떠나지 않고 공산주의에 대항했다. 그에게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공산당은 한국전쟁을 준비하며 예비검속령을 내렸고 6월 24일에 체포되었고 손자 한영순은 끌려가는 할아버지를 목격했으며 함께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신시욱의 증언으로 한사연목사는 1950년 10월 3일에 원산 앞바다에 수장되어 순교했음이 전해졌다. 한목사는 신앙을 지키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많은 이들이 월남할때에도 가족까지 교회와 지역을 지켰고 그 피해는 가족까지 이어져 4명의 아들중 3명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희생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후손들의 열악한 환경과 교회의 무관심으로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념하는 일은 지금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부연회 순교자열전, 요약출처- 장흥교회 한찬희 목사)

[한사연 목사의 사역]

①삭녕감리교회- 임진강을 끼고 있는 삭녕은 원래는 독립된 군이었다가 1914년에 연천군에 통합되어 연천군의 서북지역을 이루었는데 6․25 전쟁 이후 북한의 철원군에 속하게 되었다.(남에도 철원군이 있고, 북에도 철원군이 있다.) 삭녕감리교회는 1916년에 설립되었다. 설립될 때에는 남감리회 서울지방에 속해 있다가 그 다음 해부터 철원지방에 속했다. 남감리회 전도인들이 경기도 고양에서 전도를 하다가 당시 김화군에 속해 있었던 지경대에 와서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웠고, 지경대에서 철원, 김화로 복음이 퍼져 나갔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삭녕에도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삭녕감리교회는 초기에는 셔라우스(C. F. Shearouse: 史羅時) 선교사와 한사연(韓士淵) 목사가 담임했다. 셔라우스 선교사는 1921년에 한국에 와서 1925년까지 선교활동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강원도에서 사역했다. 한사연 목사는 평남 안주 출생으로, 예수를 믿은 다음에 매서인이 되어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전도했는데 짚신을 신고 성경과 찬송가를 등에 지고 깊은 오지까지 찾아다녔다. 북한지역이 공산화되었을 때 한 목사는 김화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월남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계속해서 예배를 인도했다. 공산정권은 김화읍교회를 빼앗아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한 목사는 가까운 곳의 성결교회를 빌려 계속해서 예배를 드렸다. 한 목사는 6ㆍ25 전쟁 중에 원산으로 끌려가서 순교당했다. 한 목사의 둘째 아들이 의사였는데 아버지의 목회를 돕다가 비슷한 때에 공산당에게 피살되었고, 자녀들 대부분이 희생당했다.

②김화읍교회- 1942년에 한사연(韓士淵) 목사가 부임했다. 피터즈 선교사가 한국여인과 결혼할 때 그 결혼식의 주례를 한 분이 바로 한사연 목사이다. 한사연 목사는 한학에 조예가 깊어 “선비목사”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한사연 목사는 짚신을 신고 등에 성경과 찬송을 많이 짊어지고 강원도 산간오지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38선이 그어지고, 김화군이 공산당 통치 밑으로 들어가고, 박해가 심해지자 사람들이 월남하라고 권했다. 한 목사님은 교인들을 버리고 월남할 수 없다고 거부하고 더 열심히 전도했다. 한사연 목사는 1946년에 김화읍교회를 떠나 김화군 금성면에 있는 금성(金城)교회를 담임하였다. 공산정권은 금성교회를 징발해서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다. 한 목사는 굴복하지 않고 이웃의 교회를 빌어서 예배를 드렸다. 1950년 3월에 철원과 김화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체포되었는데 한 목사도 이 때 체포되었다. 손녀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보니까 사람들 이십여 명이 밧줄에 묶여 트럭에 실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낯익은 모습이 있어서 잘 보니 바로 할아버지였다. 손녀가 “할아버지!” 외치자, 한사연 목사는 뒤를 돌아보면서, “그래! 네가 증인이다. 증인이 되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한 목사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한사연 목사는 원산으로 끌려갔다가 1956년 10월 3일 학살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사연 목사에게는 네 자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셋이 전쟁 중에 공산정권에 의해 희생당했다.

[한사연 목사의 순교]

1950년 6월 24일 늦은 밤, 38선을 향해 탱크와 대포를 싣고 부산히 내려가던 금강산 전철의 수송작전은 이미 끝났다. 전쟁 전야의 금성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누군가 금성교회 목사관을 두드렸다. 그는 “회의가 있다”며 잠자리에 든 한목사를 깨워 어디론가 데려갔다. 일요일인 이튿날 금성교회의 주일 종은 울리지 않았다. 영순씨는 한목사의 둘째아들인 명옥씨의 아들. 김화고급중학교에 다니던 영순씨는 그해 7월말쯤 전선에 동원되기 위해 김화인민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지를 받아놓고 있었다. 우연히 김화정치보위부 울타리를 지나가다가 할아버지 한목사를 만났다. 우람한 체격의 백발노인은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과 함께 동아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영순아, 네가 증인이다. 증인이 돼야한다!” 한목사의 가계는 철저히 유린됐다. 맏아들은 김화 생창굴 속에서 폭사 당했으며, 의사인 셋째 상옥은 원산으로 끌려갔다. 역시 의사인 막내는 김화 쑥고개 칠성정에서 총살당했다. 해주교회 사모로 시집간 외동딸 만옥은 행방불명됐다. 둘째아들 명옥만 월남했다. 전쟁이 끝난 후 금성이 고향인 사람들의 연말모임에서 영순씨는 할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신시옥(작고)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한목사는 원산 앞바다에서 4명 씩 철사줄에 묶여 수장됐다”고 일러줬다. 신씨는 그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사람이며 그는 그날을 10월 3일로 기억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지난 94년 여름 북한의 오성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구김화읍 읍내리 민통선 북방의 한 벌판에서 들었다. 영순씨는 “여기가 보위부자리, 저기가 내가 막내 작은아버지 시신을 묻어 놓고 표식으로 구두 두 짝을 올려놓았던 그 밭…”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그는 ” ‘네가 증인이 되라’고 한 할아버지의 유언이 가슴에 박힌 커다란 가시 같다”고 말했다. “기막힌 이 사연을 글로 옮길 재주도 없고, 이 사연을 귀담아 들어주는 이도 없다”며 그때 노인은 소년처럼 울었다. 6년이 지난 최근 한영순씨를 다시 만났다. 그는 더 늙어 70세 노인이 돼 있었다. 2년 전 병을 얻어 민통선 출입영농도 일부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는 내게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나는 한 순교자의 유일한 증인이면서도 그 사실을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 말을 그 때처럼 다시 했다. 그의 가슴엔 아직도 그 가시가 박혀 있었다. 변한 건 어눌해진 말투뿐이었다.(유관지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

[한사연 목사의 사역교회]

①삭녕감리교회- 임진강을 끼고 있는 삭녕은 원래는 독립된 군이었다가 1914년에 연천군에 통합되어 연천군의 서북지역을 이루었는데 6․25 전쟁 이후 북한의 철원군에 속하게 되었다.(남에도 철원군이 있고, 북에도 철원군이 있다.) 삭녕감리교회는 1916년에 설립되었다. 설립될 때에는 남감리회 서울지방에 속해 있다가 그 다음 해부터 철원지방에 속했다. 남감리회 전도인들이 경기도 고양에서 전도를 하다가 당시 김화군에 속해 있었던 지경대에 와서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웠고, 지경대에서 철원, 김화로 복음이 퍼져 나갔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삭녕에도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삭녕감리교회는 초기에는 셔라우스(C. F. Shearouse: 史羅時) 선교사와 한사연(韓士淵) 목사가 담임했다. 셔라우스 선교사는 1921년에 한국에 와서 1925년까지 선교활동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강원도에서 사역했다. 한사연 목사는 평남 안주 출생으로, 예수를 믿은 다음에 매서인이 되어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전도했는데 짚신을 신고 성경과 찬송가를 등에 지고 깊은 오지까지 찾아다녔다. 북한지역이 공산화되었을 때 한 목사는 김화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월남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계속해서 예배를 인도했다. 공산정권은 김화읍교회를 빼앗아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한 목사는 가까운 곳의 성결교회를 빌려 계속해서 예배를 드렸다. 한 목사는 6ㆍ25 전쟁 중에 원산으로 끌려가서 순교당했다. 한 목사의 둘째 아들이 의사였는데 아버지의 목회를 돕다가 비슷한 때에 공산당에게 피살되었고, 자녀들 대부분이 희생당했다.

②김화읍교회- 1942년에 한사연(韓士淵) 목사가 부임했다. 피터즈 선교사가 한국여인과 결혼할 때 그 결혼식의 주례를 한 분이 바로 한사연 목사이다. 한사연 목사는 한학에 조예가 깊어 “선비목사”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한사연 목사는 짚신을 신고 등에 성경과 찬송을 많이 짊어지고 강원도 산간오지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38선이 그어지고, 김화군이 공산당 통치 밑으로 들어가고, 박해가 심해지자 사람들이 월남하라고 권했다. 한 목사님은 교인들을 버리고 월남할 수 없다고 거부하고 더 열심히 전도했다. 한사연 목사는 1946년에 김화읍교회를 떠나 김화군 금성면에 있는 금성(金城)교회를 담임하였다. 공산정권은 금성교회를 징발해서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다. 한 목사는 굴복하지 않고 이웃의 교회를 빌어서 예배를 드렸다. 1950년 3월에 철원과 김화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체포되었는데 한 목사도 이 때 체포되었다. 손녀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보니까 사람들 이십여 명이 밧줄에 묶여 트럭에 실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낯익은 모습이 있어서 잘 보니 바로 할아버지였다. 손녀가 “할아버지!” 외치자, 한사연 목사는 뒤를 돌아보면서, “그래! 네가 증인이다. 증인이 되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한 목사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한사연 목사는 원산으로 끌려갔다가 1956년 10월 3일 학살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사연 목사에게는 네 자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셋이 전쟁 중에 공산정권에 의해 희생당했다.  

김화읍감리교회는 강원도 김화군 김화면 생창리(生昌里) 16번지였다. 건물 규모는 마흔한 평이었다. 이곳은 지금은 남한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가 되어 있다. 민통선 안에 있는 마을이지만 1970년 초부터 주민들이 입주해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현재 김화읍감리교회가 있었던 자리는 지금 논밭이 되어 있다. 김화읍감리교회가 있었던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생창리감리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 교인들의 일부가 “이 지역은 김화읍감리교회가 있었던 자리”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 생창리 부근에 승리전망대가 있는데 승리전망대에서는 비무장 지대를 볼 수 있고, 북한 군인들이 훈련받는 하전사 훈련장과 예전에 금강산으로 가던 전기철도가 놓여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다.

[김화읍]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 그 당시의 전선을 기준으로 보통 휴전선이라고 말하는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이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이 각기 2km씩 뒤로 물러나서 4km의 남과 북 사이에 공백지역이 생겼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비무장지대(DMZ)이다. 남쪽이 2km 뒤로 물러나서 철책을 친 것이 남방한계선인데 그 남방한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상당한 거리에서부터 군사작전과 보안을 위해서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민간인출입을 통제하는 선이 바로 민통선인데 1954년 2월에 설치되었다. 1970년대부터 정부는 민통선 안의 여러 지역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게 했다. 이것은 보통 민북(民北)마을이라고도 하고 통일촌이라고도 한다. 1990년대에는 민통선이 북으로 많이 올라갔다. 지금은 출입 시간은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방문목적을 말하면 출입이 가능하다. 김화군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6․25 전쟁 때 이 지역에서 싸움이 아주 치열했다. 철원․ 김화․ 평강을 “철의 삼각지대”라고 한다. “점령하기 힘든 곳”이란 뜻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김화군의 한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다. 남에서는 남에 속하게 된 김화군 지역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으로 만들었고, 북에서는 북에 속하게 된 김화군 지역을 가지고 강원도 김화군을 만들었다. 예전 김화군의 많은 지역은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 있는데 예전 김화읍이었던 지역은 남방한계선 가까운 곳의 민통선 안에 들어 있다.